오주한카


이제는 고인이 되신 장영희 전 서강대 교수의 에세이에 나오는 글입니다.

한때는 그분 수필을 끼고 다니면서 답답할 때마다 꺼내 읽다 시피한 적도 있습니다.

문득 오래된 파일에 옮겨진 그분 수필을 보고 여기 옮깁니다.

 

지금 다시 보니 교수께서 암에 걸리기도 한참 전인데도

늘 죽음을 염두한 듯한 인상을 받게됩니다.

그렇다고 그 글들이 우울하지는 않습니다.

제겐 지금도 여전히 삶의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 ?


장영희


한 여자가 중병에 걸려 가사상태에 빠졌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선을 방황하고 있는데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누구냐?"
"저는 쿠퍼 부인입니다. 이 도시 시장의 안사람이지요."
"네 남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제니와 피터의 엄마입니다."
목소리는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물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선생입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너의 직업이 무어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매일 교회에 다녔고 남편을 잘 보조했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네가 누구인지 물었다."

결국 여자는 시험에 실패했던 것 같다.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병이 나은 다음 그녀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어젯밤 무심히 TV를 켰는데 마침 어느 가수가 1970년대에 인기 있었던 '얼굴'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아얀 그때 꿈은…" 흘러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선율과 가사가 거침없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최루탄 연기와 데모대의 함성이 거리를 메우고, 탱크만이 텅 빈 캠퍼스를 지키고 있던 시절-20대에 보는 세상은 혼돈에 가득 차 있었고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이 오히려 고뇌로 다가왔지만, 삶은 여전히 꿈과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마음을 송두리째 걸고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라는 가사처럼 내 삶은 "…하려다가" 그대로 지나가버린 흐름의 연속이다. 내가 이제 죽어 누군가 내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까? 나도 이야기 속의 여자처럼 나는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선생이고, 누구의 이모이고 등등의 대답 외에 진정 내가 누구라고 답할 수 있을까?

'명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뛴다'고 했다. 나도 삶의 '명마'가 되기 위해 이제껏 뒤 한번 안 돌아보고 좀더 좋아 보이는 자리, 좀더 편해 보이는 자리를 위해 질주했고, 숨을 헐떡이며 지금의 이 자리에까지 왔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오늘 들어온 우편물 봉투마다 인쇄된 수신자 주소는 '장영희 교수' '박사' '자문위원' '이사' 등 타이틀도 다양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내가 아는 어떤 의사는 월급 많이 주는 종합병원에서 멀쩡히 잘 근무하다가 어느날 아프리카 의료봉사대에 자원해 가더니 그곳에 눌러앉았다. 떠나면서 그가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일인데 더 늙기 전에 해야죠. 못하면 후회할 거예요. 내가 나를 알지요."

'내가 나를 알지요'라고 말할 수 있고,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게 뭔지, 지금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뭔지조차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나는 이제껏 나만 보고 살았는데, 열심히 나를 지키고, 나만을 보살피며 살았는데,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토머스 머턴이라는 신학자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길,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창살 없는 그 감옥에 나를 가둬 두고 온갖 타이틀만 더덕더덕 몸에 붙인 채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