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한카


 

  원망하는 것은 사람의 버릇일 뿐이다. 욕구가 좌절되면서 생기는 결핍의 감정을 사람은 본성상 어떠한 형태로든 채우려 한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원망하며 탓하는 것이다. 아장아장 이제 막 걸음을 배우는 아기는 넘어지면 금방 일어난다. 하지만 곧잘 걷던 아이는 넘어지면 울음을 터뜨린다. 예기치 않은 좌절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이를 달래는 부모는 애꿎은 땅을 향해 때끼! 하며 꾸짖는다. 그제야 아이는 좌절감과 부끄러움을 만회라도 한 듯 일어선다. 문제는 어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탓하기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는 주체로 살지 못한다. 아장걸음 하듯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이만이 넘어져도 금새 이를 앙 무는 것이다.

 

  고등학생이 된 큰 아이가 유치원 다니던 무렵이다. 소낙비 그치고 햇살 뜨거운 여름날, 거제도 각산 바닷가 뚝방길을 발밤발밤 걷다 보면 자그마한 웅덩이를 여기저기 쉽게 만날 수 있다. 흙이 곱게 가라앉아 맑아진 물 위로 드리워진 파란 하늘 흰 구름을 구경할라 치면 장난끼 많던 아이는 첨벙첨벙 웅덩이로 뛰어들어 아빠를 골탕 먹이곤 했다. 허나 하늘보다 더 파란 웃음을 건네주니 덩달아 웃을 수 밖에. 그렇게 장난을 치던 아이가 저만치 앞서 가서는 주저앉아 뭔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고운 흙에 지렁이가 꿈틀대며 기어간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아이도 인생에 대한 어떤 예감을 느낀 것일까? 누구는 인생은 초월이 아니라 포월이라 했다. 뛰어 넘는 것이 아니라, 기어서 넘는다는 뜻이다. 그렇다. 인생 참 만만치 않다.

 

  모처럼 찾아 온 후배와 밤길을 걸었다. 짙은 어둠, 그윽한 달빛 아래 차마 거짓이 똬리를 틀 겨를이 없다. 서로의 순례기를 주고받으며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걸어온 길을 가늠해보니 제법이다. ’언제 이렇게 멀리까지 왔지?’ 깜짝 놀랐다.

  그렇다. 돌아서자니 걸어온 길이 아득하고, 계속 가지니 가야 할 길이 막막하다고 느껴지는 것, 인생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막하고 아득한 길을 즐겁게 거닐 수 있는 것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길벗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란 수많은 발걸음이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다. 길이 단순히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공간만은 아닌 이유다. 길은 사람들이 걸어 생기는 것이지만, 길은 그 길을 걷는 이들에 대한 기억의 온축이기도 하다. 길은 지향이기에 희망이고, 기억을 환기시키기에 그리움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길을 잃었다는데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에 불안한 시선을 던지며 걷는 동안에는 희망도 그리움도 떠오르지 못한다. 그래서 논두렁 길에서는 개구리가 뛰고, 오솔길에게는 산꿩이 울고, 신작로에서는 자갈이 튀면서 먼지가 날리고라고 노래하던 한 시인은 돌연 고속도로에서는 국민 여러분!’하는 연설이 흘러나온다.”고 노래한다.

 

  차들이 질주하는 고속도로와 도심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기억을 반추할 여유를 찾지 못한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늠하기도 힘들다. 구호에 쫓겨 숨가쁘게 달려가야 할 목표만이 있을 뿐.

  하지만 길은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느긋하게 걷는 이들에겐 정겨운 눈길과 함께 앞서 걸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니 말이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참 길을 만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