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한카


 

  “우리 아들 좋아하는 꼬막 사려고 시장에 갔었는데 별로 싱싱한 게 없더라구.”

  몸도 안 좋으신데 더 큰 아들에게 사오라고 하시지 뭘 시장까지 내려갔다 오셨어요?”

 

  7년만의 귀국을 앞두고 여러 계획들을 세웠지만 그 중 꼭 먹고 싶었던 것 두 가지를 떠올리며 반드시 먹고 오리라는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헌데 외출하고 돌아와 어머니가 차리신 밥상을 앞에 두고 나는 훔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 중 하나가 꼬막이었던 터, 싱싱한 꼬막을 삶아 껍질 반쪽을 떼어내고 거기에 맛난 양념장을 얹어 먹는 맛은 예나 지금이나 가히 꿀맛이다. 헌데 나도 잊고 있었던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어머니는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 땅에서 부하게 산다는 것, 힘있게 산다는 것은 더 넓은 선택의 폭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스스로 선택하여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허나 자본이 주인 된 세상은 스스로의 선택마저도 부인하며 강요된 것이라 여기도록 압박한다. 인간 내면의 욕망의 웅덩이를 향해 늘 새로운 미끼를 던지기 때문이다. 결국은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꿈꾸고 있었는지 조차도 망각하게 한다. 살아가되 정작 나를 잃고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꼬막 한 접시에, 나조차 잊고 있었던 나를 발견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절망과 고통 속에 내몰린 사람일수록 따뜻하게 사람 대접을 받을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를 기억하여 마음을 다해 환대하는 것이 님의 선한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부활절 아침 예수의 무덤을 찾아왔던 마리아는 주님이 여인아!’하고 말을 건넸을 때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주님이 마리아야!’라고 부르는 순간 주님을 알아보지 않았는가? 누군가에게 기억되어 내 이름이 불리워지는 순간 우리들은 자기 생의 주인으로 호출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하리라.

 

  세상은 누군가의 행위에 대해 항상 설명을 요구한다. ‘이유가 뭐예요?’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되었나요?’ 꿍꿍이 뭐냐고 솔직히 대답하란다. 이렇게 질문을 하는 이들은 그냥혹은 괜히라는 대답에 쉽사리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론 이유 없는 사랑과 친절에 대해서 조차도 의혹어린 시선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허나 이역만리 몸은 떨어져 있으나 마음 안엔  늘 자식을 품고 사시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누가 토를 달 것인가? 어떤 질문이 가능하겠는가?

 

  밥상 한 켠 알맹이를 비워낸 꼬막 껍질이 쌓여 갈수록 어머니의 흐뭇해지는 얼굴이 더욱 빛을 발한다. 자신을 내어줌으로 나를 살린 십자가가 예 있지 않은가?

 

 

Atach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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