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심겨진 씨앗에게 나무의 몫을 기대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 생명이 쓸모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 위해서 기다림은 필연인데도 말입니다.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나를 못내 힘겨워하는 터에 님은 나를 위로하는 노래 한 자락을 들려주셨습니다.
“나 같은 것이야. / 사랑방 군불로 지펴져도 좋아요. / 미끄러운 골목길에 뿌려져 / 밟히고 밟히다가 / 그나마 흙 속에 파묻혀도 좋아요. //
쇠죽 속 펄펄 끓는 물속에서 / 콩깍지에 구박을 받아도 좋아요. //
내 속에서 빠진 / 한 톨의 쌀. //
그 이름에 욕되지 않는다면 / 까짓 나 같은 것이야. / 하다못해 이제는 소나 돼지에게마저 / 멸시 받아도 좋아요.”
- 정영상, ‘왕겨’
“나 같은 것이야”, “까짓 나 같은 것이야”
깊은 한숨과 함께 토해지듯 가슴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는 소리를 뒤로, 시인이 건네는 노래는 문득 내게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당신 몫의 모든 걸 자식에게 양보하시고는 그저 주름만 늘어 가시는 어머니가 말없이 속으로 되뇌인 소리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혹자는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그릇된 자기비하라고 질책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다릅니다.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이만이 드러낼 수 있는 겸손의 표현이요, 십자가 위의 내 님이 “다 이루었다.”하신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 비하는 자기의 정체성 및 자기의 쓰임새 곧 사명을 잘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상이지만, 어머니는 당신의 사명을 온몸으로 감당하셨으니까요.
왕겨와 쌀알이 함께 있을 때를 우리는 벼라 부릅니다. 왕겨는 쌀알을 싸고 있었던 껍질이지요. 왕겨의 쓰임새 곧 그의 사명은 쌀알을 잘 감싸는 것입니다. 쌀알을 감싸 보호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홀로 남았을 때, 일컬어 왕겨가 되는 것입니다. 쌀알을 품고 있을 때는 그저 벼라 부를 뿐 결코 왕겨라 부르지 않으니까요. 쌀알은 밥이 되어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 그 껍질은 쌀알이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사명을 가진 것입니다.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한 체 버려진 듯 남은 왕겨가 내뱉는 ‘나 같은 것이야’하는 소리는 그러한 자기 비움과 버림이 있었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음을 어렴풋 짐작케 하는 가르침인 것이지요. 남이든 본인이든 무시하고 멸시하는 마음은 쓰임새를 알지 못하는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때를 알아 기다릴 줄 모르는 성급함은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복은 저마다의 쓰임새를 알아보고 알아주며, 행복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동참하는 것일 뿐,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 ‘더 큰 것’이라는 존재의 우월이 아닐 테니까요.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는 법이란다.” 허물투성이인 우리의 삶이, 그리고 작고 보잘 것 없는 우리의 교회가 쓰임새를 온전히 알아, 하나님의 행복한 창조세계의 아름다운 한 구성원 이길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