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한카


알기 쉬운 영성- 일곱 번째 이야기 by 임종대 목사(예수의 사람들 교회, 영성훈련가, 저술가)

 

7. 영성형성은 하나님 알기로부터

 

“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혹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

 

   “ 영성은 묵상(혹은 명상)이다” 라고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성형성을 위한 영성훈련의 한 부분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반복해서 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영성이 있는 사람이 곧 묵상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은 조용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안정을 취하거나 한적한 벤치나 숲속 바위위에 앉아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런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받는 영향이 다가 아닙니다. 자꾸 세상에서 강조하는 ‘선’이나 ‘요가’와 같은 자기강화 문화와 비교하거나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미국에 살고 있기에 미국의 예를 가끔 드는데, 미국은 지금 영성을 묵상이나 명상과 혼동하며, 동양적인 신비주의에 심취하거나 불교의 선을 따라가는 부디즘 크리스천(Buddhism- Christian)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잘 다스린다고 해서 기독교 영성을 제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영성은 신비다’라며 기독교 영성을 규정하는 분들의 의견이나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거나 심지어 저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서술은 매우 제한적이며 기독교 영성이 찾는 올바른 방향(자기 중심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중심)과 역동적인 힘(자기강화나 자기구원에서 자기포기를 통한 주님과의 연합)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의 하나님과의 사랑, 교제,음성듣기 ,사역등에 관계한 본래성”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제하고 사역할 수 있을까? 즉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영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알수 있느냐?“ 대한 관점과 ‘하나님이 어디계시냐?’(다음 회에 다룸)의 입장에 따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 혹은 분리된 관계성이 결정되며, 영성을 깊게 하는 ‘영성형성’과 ‘영성훈련’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제가 보건대 교회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었고 그 두가지 흐름을 경계로 해서 알게 모르게 개인이나 지교교회 혹은 전체 교회 전반의 신앙생활 규정하였고, 모든 신학들의 주장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초월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해서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가 어렵고, 멀리 계셔서 하나님을 잘 알 수 없지만 잘 믿는 사람에게 물질적 복을 주신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신비적인 경험을 중요시 여겨 조직폭력배라도 하루 아침에 능력 있는 목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용인됩니다. 하나님을 믿되 그 사이가 멀리 있으며, 은혜만 충만하면 된다고 생각해 영적훈련을 불필요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만 예수님 없는 자기중심의 신앙생활을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매우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런 관점과 태도를 바꿔야지 비로서 한국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알기에 대한 내용은 제가 쓴 책(『예수님 닮기와 예수님 처럼 살기』의 한 부분을 그대로 약간 수정해서 인용해 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 알기의 두 가지 흐름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아마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지만 선뜻 이해가 되거나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꼼꼼히 정독하셔서 핵심적인 내용만 이해하셔도 앞으로 영성형성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가? 우리가 하나님과의 일치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안다는 것은 하 나님을 안다는 것과 매우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는 것에 대해 기독교 역사 속에서 두 가지 흐름이 있어왔습니다. 그것은 카타파틱(kataphatic ) 관점과 아포파틱(apophatic)관점 입니다. 카타파틱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반면 아포파틱은 부정적인 관점으로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동방기독교(그리이스 정교회의 영향)와 서방기독교(로마카톨릭의 영향)의 또 다른 차이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타파틱은 서방기독교가 하나님알기에 대해 사용하는 방법이라면 아포파틱은 동방기독교가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카타파틱 관점은 있는 그대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특별히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드러냄은 그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하나님을 서술한다고 보며 예수그리스도를 중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의 위험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으며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있다는 인간의 거만함이 담겨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포파틱 관점은 하나님이 인간이 알수 있는 드러냄보다 신비함 속에 감춰있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종종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존재하는 분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그 위험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불가지론입장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진실도, 어떤 것도 완전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관점들이 모두 옳다고 하거나 틀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각각의 두 가지 입장의 최고의 권위자들이 그 본질의 내용을 인정하고 그 위험한 관점들을 완화하고자 했던 것들은 주목할 만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입장에서 각각의 접근이 본질적으로 잘함과 잘못을 따지거나 서로 비판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동양적인 신비함을 추구하는 한국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서방기독교가 취하는 카타파틱에 가까운 입장을 취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남김없이 서술하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는 그가 존재하는 그대로 하나님임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부분적으로 관계를 갖는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불완전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도 불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알아야 아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알 때, 안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비의 문제는 우리의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느 사람을 안다고 함에 있어서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말하며, 그 앎이 더해져 더 친밀하고도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바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주심의 완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앎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부분은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전체는 부분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때 아포파틱의 위험성은 카타파틱의 위험성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신비의 영역이라는 불가지론 차원에 머문다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 완전히 하나님의 신비함 까지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인정도 필요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작은 경험과 일 부분의 앎에도 하나님을 다 경험한 것처럼 말하며 하나님이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요? 우리는 하나님을 앎에 추구에 있어서 겸손해야 합니다(우리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지식의 차원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과 같은 차원에 대한 것입니다). 카타파틱은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처럼 사는 삶과 닮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방기독교의 아포파틱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의한 신비스러운 연합을 말합니다. 이런 신비주의적인 입장은 육체적이고 엄격한 훈련보다는 신비스러운 은총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신비와 은혜의 측면을 많이 강조한다는 차원에서 신비주의적이며 동방기독교적인 특징을 많은 부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심각하고도 위험한 문제는 그 신비적인 경험이나 은혜의 경험을 강조하고 머물게 된 나머지,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표현하고, 혹은 예수님인 것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신비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와 합일을 했어도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한다는 관점도 아니며, 하나님을 알기 위해 예수님을 닮고자 한다든지 예수님께 오직 초점을 맞추어 성찬을 강조하며 말씀읽기와 기도와 같은 영성 훈련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서방기독교적인 관점을 따르지 않는 다는 점에서 서방기독교의 관점도 아니고 동방기독교의 관점도 아니면서 필요한 것만 취한 불명확하고 어정쩡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