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한카


          * 알기 쉬운 영성- 열 두번째 이야기

               12. 영성형성을 위한 하나님과 거리 2
                                                          by 임종대 목사(예수의 사람들 교회, 영성사역가)
        
“ 관상적인 삶은 임마누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가장 가깝게, 잘 표현합니다.”
 
  11월 10 일에  L. A 지역에 가서 영성세미나를 하려고 합니다.  일단 “ 예수님처럼 사는 영성형성”을 주제를 다루려고 하는데, 이 글을 보는 분들 중에 L.A 지역에 지인들이 계시면 참여하도록 연락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늘 저 너머, 이 세상 어디에든지, 내 안에. 물론 다 일수 도 있고, 어느 한 가지에 중점을 둘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추천 도서 중에 한 가지가 “ 신에게 솔직히” 라는 책으로. 전통적인 하나님 존재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책으로 기억됩니다.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하늘 너머, 산신령의 모습으로 계시다고 생각하며,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땅 위에 있는 그의 백성과 사람들에게 개입하는데, 선한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사람에게 벌을 준다고 하나님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지금 이 글은 읽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다고 믿고 있습니까? 기독교인이라면 어딘가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어딘가에 계신지에 대해 말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이것 또한 쉬운 질문 같지만 대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그리고 언제든지,” “자연속에서 기도할 때,” “내가 무엇인가 필요할 때,” “특별히 교회 안에서” “잘 알 수 없고, 불가능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등등 여러 가지로 조합을 할 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말이 임마누엘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번에 이어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언약은 불변합니다. 약속하신 대로 마태복음 1: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애정표현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영적인 하나님께서 보이는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죽으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심으로 인간과 모든 피조의 세계를 살리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총괄갱신) 때로 구원을 말씀하시고, 때로 심판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형상을 입고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해(임마누엘)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거리를 완전히 없애신 것입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세상과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으며, 인간과 깊은 교제와 만남을 원하시며, 죄와 사망대신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가까이 와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과 새로운 친밀한 관계를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말씀이 육화되어 오셨고, 그것을 성육화(Incarnation)라 부릅니다. 제가 영성형성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주의 영안에서 말씀을 통한 육화 즉 ‘예수님처럼’ 되어 지는 것이요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과 그 거리를 없애고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안에 살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아버지와 동격으로 두었고, 예수님의 영이 있는 사람은 곧 아버지가 우리 안에서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차 이뤄질 일로,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영성이 가장 잘 형성된 예수님과 연합된 예수님의 사람의 완전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창조의 세계를 품고 계신 하나님안에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를 성전삼아 존재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완전하면서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육신되신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성령의 내재하심을 통해 임마누엘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거리가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거리이며, 영적인 교제의 참된 모습이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 38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 하셨던 말의 의미가 바로 주님과 연합되어 있는 상태로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것이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람의 모습이며, 영성형성이 잘 되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현실속에 교회나 기독교인이 느끼는 하나님과의 거리는 매우 다양하며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며, 목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는 성도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은 듯 합니다.

<정형화되고 교리화된 하나님과의 관계 거리를 넘어서라!>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에게 나으시고....... ”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입니다. 이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학적 사고나 신앙고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였습니다. 솔직히 사람과의 관계도 쉽지 않은데,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을 정확히 알고 관계를 맺고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리적으로 말고,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알고 계신지요? 하나님을 아느냐? 어디에 계시고 어떻게 관계하느냐? 에 따라 다양한 신앙색깔을 드러내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다고 믿고 있는 것, 거리의 정도, 관계의 방식은 알게 모르게 모든 신앙양태 모두를 결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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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와 신앙에서 크게 세 가지로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어느 것이 옳다가 아니라, 강조하는 점이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는 초월적인 입장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거리가 굉장히 떨어져 있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런 생각이 강한 신앙인들에게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매개자로서의 목회자(구약시대의 예언자)를 중요시하게 여깁니다. 목회자를 신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신앙의 방식에 있어서 삶의 신앙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일반사람들과 다를 바가 거의 없으며 주일날 예배에서 신과의 매개자인 제사장을 통해 죄사함의 은혜를 강조하며, 자신의 문제나 사회적 성공을 위한 유성기도가 강합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건물 속에서 드리는 예배를 중시할 수 밖에 없으며, 제사장 같은 목회자 중심(hierarchy상명하복의 구조)의 교회구조를 가지며, 삶의 영성을 가질 수 없고, 예수님처럼의 삶을 살기가 어렵게 됩니다.

둘째는 내재론적인 입장으로 이 땅위에 어디든지 임재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위에 계시다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어디에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관점이 강한데 특별히 전통적으로 켈트족들의 영성이 이런 면이 강한데 자연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원을 중요시하였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낙관론적인 입장과 자연에 대해 신비함과 관조적인 입장이 강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 존재관은 성경, 교리, 교회건물을 그리 중요시 않게 다루며, 자연주의 경향이 강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물을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기도 하며, 문자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영성의 삶을 살게되는데, 복잡한 삶의 현장에서 지쳐 삶의 자리를 떠나고 싶은 현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며 관심을 갖는 영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내재적인 입장에서 형성된 영성은 신비적인 면이 강한 반면에 실제의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주제인 예수님처럼의 삶의 영성을 가지고 삶과 사역의 현장을 다루기에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관상적인 입장으로, 이것은 지극히 저의 주관적인 내용일수 있는데, 새로운 한국적 영성 형성에 있어서 중요하게 강조하고 싶은 관점입니다. 저 멀리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것도, 세상 위에 존재하며 언제든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실로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하나님안에서 저와 모든 생명의 세계가 동시에 예수님 안에서만 생명의 센터에 존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중심에 존재한다는 관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중심의 영성을 강조하며, 매일매일 친밀한 교제와 사랑 속에서 예수님처럼의 삶과 사역을 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영성형성을 가능케 합니다.
사실 관상적인 입장은 지속적으로 기독교 신앙속에서 있었던 관점이지만, 이것은 실제적으로 적용한 것은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렉치오 디비나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성경읽기와 묵상을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과의 만날 수 있고, 심지어 영적인 존재인 사탄과의 영적싸움까지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전통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20세기 부터 토마스 머튼 신부님에 의해 관상이라는 말이 하나님과의 밀접한 기도와 삶을 설명하는 보편적인 단어가 되었고, 묵상과 함께 관상적인 삶이란 개념은 점점 죽어가는 서구 기독교의 영성회복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로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어떤 개신교 목회자나 평신도 중에는 영성이라는 말과 더불어 관상 혹은 관상기도를 카톨릭 전통이라 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짧은 이해에서 오는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념이란 현상이나 실재를 표현하는 방식이지 그것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요,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기에 그것은 사용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편 20 세기 초에, 오랫동안 정통 카톨릭의 교황중심과 교리 중심의 신앙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과 관계방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 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실재는 개념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와 깊은 교제와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였고, 우리의 생명의 중심에서 우리를 주관하시며 인도하시기에 관상적인 삶의 신앙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왜곡되고 하나님과 멀어진 신앙생활을 새롭게 하고 깊은 영성을 가지고자 할 때, 영성형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존재방식이요, 사람과의 관계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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