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한카


* 예수님처럼 살기 위한 영성- 아홉 번째 이야기 by 임종대 목사(예수의 사람들 교회, 영성훈련가)

 

9. 영성 형성을 위한 하나님알기(2)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더 깊게 알기를 원합니다.”

 

   지난 번에 “영성형성이 왜 필요한지?”와 영성 훈련을 위한 중요한 이유로서 하나님 알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알아서 아는 것인지,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인지 스스로 집중해서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입장에서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없을 듯싶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하나님 알기에 대해 더 나누면서, 여러분들의 생각이 더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14 년 전, 제가 속한 감리교회의 강화동지방 사경회(지방의 교회들이 1년에 한 번 모여 성경공부와 집회를 함) 때, 제가 맡은 부분이 호세아서였는데, 읽고 또 읽고 묵상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 묵은 땅을 지경하라”“ 묵은 한국교회를 지경하라!”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학, 정보, 이론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닌 실제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았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어떻게 이뤄갈 것인가?”를 고민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자”에서 ‘알다’ 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야다’로서 부부사이의 관계처럼 아주 깊고, 친밀한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표면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향해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내가 아는 하나님이 정말 성경에 있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신가?”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는 아닐진대, 그럼 내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모르는 것은 아닌가?”“ 모르면서 ”“목회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 여러분의 선택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려던 영성을 가진 분들에게 큰 고민 중의 고민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알고자 할 것이며,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지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이런 고민의 결과들로서, 무 정념 신학 즉 아포파틱(Apophatic Theology))관점은 인간이 지성이나, 어떤 형상, 그리고 대상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어떤 표현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다는 관점을 내놓았습니다.

이런 관점의 흐름위에 있던 대표적인 사람들로 어거스틴(354-430)과 슈도 디오니소스(500년경)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으며, 신비주의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생각이나 그 어떤 것을 뛰어넘은 하나님과 합일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전에 있었던 것을 정리하여, 정화(정결케 함)- 조명(하나님의 빛이 영혼을 비춤)- 합일(하나님과의 합일)의 단계를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에 인간과의 신비적인 합일 혹은 연합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이런 신비주의 전통을 이어간 것이 엑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제도, 성경, 교리, 건물에 제한 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신비적인 합일을 위해 무정념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관점에서의 영성형성은 자신을 부정하는 훈련을 통해 자신의 무아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가난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합일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나 노력보다 은혜를 강조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주로 동방기독교에서 볼 수 있지만 서방기독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은혜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던 것의 실패경험을 통해 펠라기우스(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와의 논쟁을 강하게 벌였던 것입니다. 이런 아포카틱 (무정념)의 관점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인간 스스로 알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고 이런 인간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은 수동적인 신앙양태를 가지게 되었고, 영적인 성장이나 성숙을 위한 자신의 노력이나 훈련을 등한시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점은 은혜를 많이 강조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동일한 문제점들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해결 방법을 찾기위한 중요한 접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는 하나님알기에 대한 다른 차원이 카타파틱 신학(kataphatic Theology), 즉 정념 신학의 관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감정, 의지, 지성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고 했습니다. 보고 들을 수 있는 대상물들, 즉 아이콘(성화나 성물), 성경, 자연물을 통해, 하나님의 다양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알기 위한 통로라고 여겼습니다. 인간의 몸(영,혼, 육)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관점에서 인간의 참여를 하나님알기의 한 방법으로 중요하게 여긴 것이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켈틱영성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모든 것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어느 한 부분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듯, 한 부분을 통해 전체인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듣는 것 들을 통로로 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념 신학(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의 관점은 동방기독교에서 아이콘(Icons: 성화나 성상)을 통한 하나님 알기와 만남의 신앙생활을 인정하였고, 서방기독교의 전통에서서는, 지속적인 말씀과 영성훈련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베넥딕트(480-547)가 창설한 수도원에서 시작된 렉치오 디비나(Rectio Divina)는 영적인 말씀읽기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적극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신비주의 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나, 성경읽기와 묵상기도등이 인간의 지성, 감성, 영성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참여를 통한 하나님 알기가 가능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잠간 흥미로운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위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알기의 관점이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 하는 차원에서 달라 보일 수 있지만, 대부분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성경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저는 렉치오 디비나 와 같은 영적인 읽기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위의 관점들을 들으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는 진리,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진리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냥 하나님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동방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맟춘 기독론이 중심이었다면, 서방기독교는 원죄의 강조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하나님알기에 있어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어보여도, 시대적으로 하나님을 더 알려고 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했던 갈망의 표현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본질은 하나님을 그 어느 것보다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0-1153) 은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네가지 사랑의 단계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첫 단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한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셋째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덧붙이자면, 타종교의 영성와 기독교 영성의 이해와 관련해서, 위에서 논한 하나님알기 관점의 방법론은 기독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불교는 ‘참선’을 강조하는 조계종과 ‘경전읽기’를 강조하는 화엄종으로 크게 구분합니다. 그 깨달음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입니다. 돈오돈수는 ‘참선’을 통해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진리로 들어가는 ‘화두’를 잡고 깨닫기 위해, 자신을 엄격하게 훈련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인간의 고뇌와 영역을 넘어 큰 깨달음을 얻고 살아있는 부처가 된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노력이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반대로 ‘돈오점수’는 지속적으로 세속으로 벗어나서, 인간의 고뇌를 벗을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며 그런 차원에서 불경을 읽고 점진적으로 깨달으면서 부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진리를 향한 고민의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혹시 타종교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의 동일한 점과 차이점의 이해를 위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다른 것은 타 종교는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 현세로부터의 자기구원을 시도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명상, 요가, 기 훈련, 단 훈련 등은 자기스스로의 노력과 수련을 통해 자유함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다양한 비기독교적인 시도들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친밀한 관계성을 강조한다는 차원에서 영성형성과 영성훈련이 다뤄진다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를 둘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깊은 차원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는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지금까지 이런 두 가지 방향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알든 모르든 이런 부분이 개인이나 교회들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하나님 알기가 직접적으로 영성형성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와 영성형성을 위한 영성훈련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 중심의 차원으로부터 예수님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었던 주요 흐름을 소개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영성의 흐름의 연장선상에 제가 있으며, 예수님처럼의 삶의 영성이 현재의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하고 집중해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할 것입니다.

 

 * 문의할 것이 있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임종대 목사(예수의 사람들 교회,jooc21@hanmail.net; 1-740-816-5236)께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저희 교회에 오시는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