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한카


 

   잃어버린 것들에 애달파 하지 아니하며

     살아 있는 것들에 연연해하지 아니하며

     살아가는 일에 탐욕하지 아니하며

     나의 나 됨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내 안에 살아 있는 오늘이 되게 하소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아니하며

     부유해도 오만하지 아니하며

     모두가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아니하며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통해 하지 아니하며

     소중한 것을 상실해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격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 작자 미상, ‘오늘을 위한 기도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 36)

 

  인생이란 마치 삶과 죽음 사이로 난 외길을 걸어가는 여행길 같습니다. 더러 그 길을 마음껏 즐기고 누리며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서 돌아가 소풍 잘 다녀왔노라고 이르는 사람도 있지만, 나 같은 사람은 마치 곡예라도 하듯 아슬아슬하게 그 길을 걷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수 백 번도 더 사라졌을 위태위태했던 나날들이지요. 그렇기에 제 삶은 그저 하나님 사랑의 결과라고 밖에는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와서 자주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한없는 나의 모자람 속에 자리한 님의 커다란 은혜처럼, 님은 절망 속에는 희망을, 슬픔 속에는 기쁨의 씨앗을 심어놓고 있다는 것이지요. 십자가 안에 찬란한 생명과 영광스런 부활이 자리 잡고 있는 것 처럼요. 결국 우리네 삶 안에는 이미 죽음이, 죽음 안에는 또 삶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많은 이별을 경험했습니다. 일시적인 이별도 그렇지만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등을 돌리는 이별도 나이보다는 제법입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사춘기 즈음에 인생은 서서히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삶의 환희를 꿈꾸어야 할 나이에 죽음을 생각했던 것은 그만큼 이별이 주는 아픔과 절망, 그리고 사무치는 그리움이 자아낸 아픈 상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음은 축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우리는 덜 기고만장하게 살아갑니다. 죽음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덜 잘난 체 하고, 덜 떵떵거리며 살아갑니다. 또한 죽음이 있기에 남은 자의 소중함을 가슴 절절이 새길 수 있으니까요.

 

  결국 죽음은 하나의 축복이요, 축복인 죽음 앞에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세는 그저 오늘을 충만히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이 오늘임을 알아 다만 마음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길이기도 할 테니까요.

  하나님께서는 매일 우리의 어제를 남김없이 거두어 가십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오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밤새 땀흘려 만드신 오늘을 말입니다. 그렇게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늘이라는 선물을 님이 주시는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과제일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더욱 즐겁게 거니는 비결일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