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한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한 마디 토를 달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주변세계를 재배치한다. 그런 이들을 만나 상처 입지 않고 헤어지는 것은 드문 횡재이다. 그들은 욥의 세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 앞에 넋이 빠진 친구에게 그들은 인과응보의 잣대를 들이댔다. 욥의 죄를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겪는 불행이 그의 죄를 입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알 순 없지만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는 거 아니냐는 거다. 엄청난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 받는 현실을 두고 불신앙 운운 하는 종교인들 또한 그렇다.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 스스로의 ‘모름’을 용납하지 못한다. 때론 안다고 하는 것이 독선이요 폭력이 되는 경우가 이 때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운 사람은 누구나 죽임을 당했다. 어차피 죽일 거면서 그는 왜 희생자를 그냥 죽이지 않고 침대를 늘였더 줄였다를 반복했을까? 자기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는 임의로 결정한 기준을 가지고 남을 재단하면서도 분명한 기준에 따랐다는 명분에 집착했던 것이다.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곱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고 하는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전도서 7장 16-18절, 표준새번역)

 

  이방원의 ‘하여가’를 보는 듯 하다. 허나 이 말씀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 어중간한 위치에 서서 그럴 듯 처세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라는 말일 것이다. 자기 기준에 집착하는 사람은 언제나 극단에 치우치곤 한다. 그러나 극단의 자리는 온전한 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도무지 내 기준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해도 다른 자리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때가 있고, 도저히 답이 없는 현실인 듯 해도 시간의 강을 건너 돌이켜 보면 문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아무도 멸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 세상에 ‘절대’란 없다. 오직 하늘 아버지만을 절대자라 일컫는 이유이다. 고로 자기를 상대화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알 수 없음을 받아들임이 겸손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마치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사람들, 안 해 본 일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그들은 절대자를 절대자로 인식할 수 없다. 그 마음에 이웃에 대한 아픔꽃도 피어날 수 없다. 그들은 모르는 게 없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세상 현실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 말고, 많이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을 보고 싶다. 그렇게 공감(共感)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