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한카


  며칠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웠다. 잔뜩 물기를 머금고 있으면서도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구름 같다.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지 못해 모두를 짜증나게 하는 눅진 마음을 어디에든 내려놓고 싶다. 하루에도 한두 차례 시원하게 비를 쏟아내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무지개를 드리우던 하와이, 그 뽀송뽀송한 햇살의 마음이 그립다.

 

  "사막은 또한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한 사람에게 하루 2.5리터의 물, 간소한 음식, 몇 권의 책, 몇 마디 말이면 족하다. 저녁은 전설, 이야기, 웃음 가득한 밤샘으로 이어진다. 나머지 시간은 명상과 정신 수양으로 보낸다. 두뇌는 오직 한 곳을 향하고, 드디어 우리는 하찮은 일, 쓸데없는 것들, 수다스러움에서 벗어난다."

  - 테오도르 모노, '사막의 순례자' 중에서

 

  어쩌면 지금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생략하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하찮은 일, 쓸데없는 것들, 수다스러움'에 매여 붙잡아야 할 '오직 한 곳'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깃털을 세워 자기르 크게 보이려 하는 싸움닭 같이 어리석은 자기 확장의 욕망에 자신을 내던진 까닭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덧씌워진 욕망에 자꾸만 발이 걸린다. 욕망이 커질수록 존재는 천박해지고, 감당해야 할 삶은 무겁기만 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은 덧붙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덜어냄을 통해서만 영혼 안에서 발견된다."고 했고, 어느 소설가는 인위적인 것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유다 광야에 들었더니 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더라고 했다. 그렇다. 삶에 필요한 것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오래 전 이집트 사막을 여행하다가 유목민인 베두인의 천막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는 돗자리가 깔려 있고 옷가지 몇 벌, 그리고 조촐한 부엌 세간살이가 전부였다. 그 남루한 살림살이를 보는 순간 내 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솟아올랐다.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사는 나의 삶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말을 잊은 채 그 천막을 돌아나오다가 자그마한 원을 이루며 놓여있는 돌덩이들을 보았다. 뭐냐는 질문에 베두인족 사내는 목동들의 기도처라고 말했다. 참 간단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신전이 아닌가? 기도와 삶이 분리되지 않으니 텅 빈 영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리라.

 

  돌이켜 내 작은 시간들을 바라보니 무언가를 채우려 발버둥친 시간의 합이다. 주머니를 채우고, 배를 채우고, 머리를 채우려 안간힘을 써왔다. 뭐든 채워야 유익이 있다고 믿어 때론 안면 몰수도 하고 아우성도 치며 살아왔다. 이젠 채우려 애쓴 만큼 비우며 살아야겠다.

  힘겹다고 늘어놓던 넋두리도 내려놓고, 세상만사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절망하던 마음자리도 내려놓고, 무례하고 얍삽한 인간 군상 때문에 속상해 하던 마음은 물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을 보며 비분강개하던 마음도 내려놓아야겠다. 그렇다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하며 너무 쉽게 초월해 버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저 우울한 현실에 붙들려 삶의 신비를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할테니. 비운 만큼 맑은 정신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길에 먼저 발을 내밀고, 잠든 영혼을 만나면 흔들어 깨우고, 지친 사람을 보면 부축해 일으키고, 외로운 사람을 보면 길벗도 되어주고, 몹쓸짓을 하는 사람을 보면 야단도 쳐가며 그렇게 더불어 걸어가리라. 물론 시간 속에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아침마다 거룩한 기도의 신전을 세워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으리라.